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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영종 (1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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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 영종(懿璘質班)은 1332년 10월 23일에 즉위하여 같은 해 12월 14일에 사망한 원나라의 제15대 황제이다. 명종 쿠살라의 둘째 아들로, 6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으나, 섭정이었던 엘 테무르의 영향력이 컸다. 즉위 2개월 만에 사망하였으며, 사후 충성사효황제의 시호와 영종의 묘호가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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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영종 (15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원 영종 이린친발 칸의 초상화
원 영종 사효황제 상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칭호몽골 제국의 제14대 카안 (명목상, 제국 분할로 인해)
원나라의 황제 (제10대)
전체 이름몽골어: 린친발
중국어: 의린질반
묘호영종(寧宗)
시호충성사효황제(沖聖嗣孝皇帝)
생애
출생일1326년 5월 1일
사망일1332년 12월 14일
사망 장소대도, 원 중국
아버지쿠살라
어머니바부샤, 나이만 출신
배우자콩기라트 씨족 출신 다리예테미시 황후 (1332년 결혼-1332년 사망)
통치
즉위1332년 10월 23일
퇴위1332년 12월 14일
연호지순(至順) 1332년
계승자우카가투 칸 토곤 테무르
왕조
가문보르지긴
왕조
기타
종교(정보 없음)

2. 생애

명종 쿠살라의 둘째 아들이자 토곤 테무르(혜종)의 동생으로, 어머니는 나이만 부족 출신인 바부샤였다. 쿠살라가 차가타이 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 태어났다.

아버지 쿠살라가 사망하고 숙부 투그 테무르(쿠살라를 독살한 것으로 추정됨)가 즉위했을 때, 린친발은 푸왕(Prince of Fu)에 임명되었다. 1332년 투그 테무르가 사망하면서 형 쿠살라의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당시 권신 엘 테무르는 쿠살라를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기에 쿠살라의 장남 토곤 테무르가 즉위하는 것을 반대했다. 투그 테무르의 미망인 부다시리 카툰은 투그 테무르의 유언을 존중하여 6살의 린친발을 황제로 옹립했다. 대도에 있던 린친발은 1332년 10월 23일에 즉위했으나, 12월 14일에 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

엘 테무르는 다시 부다시리에게 엘 테구스를 옹립할 것을 요청했지만, 또 거절당했다. 결국 엘 테무르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토곤 테무르를 황제로 옹립할 수밖에 없었다.[4]

2. 1. 출생과 즉위 이전

1326년 5월 1일(음력 3월 29일) 명종 쿠살라와 나이만 부족 출신 정궁 황후 바부샤 카툰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바부샤 카툰은 쿠빌라이 칸의 손자 카말라의 외손녀이며, 남편 원 명종과는 6촌간이었다. 원사에 의하면 그는 1326년 음력 5월 1일 북방 초원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아버지 쿠살라가 알타이산맥 서쪽에 망명 중일 때 태어났으며, 명종 쿠살라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정궁 황후 바부샤 카툰의 아들이었다. 이복 형으로 명종 쿠살라가 중앙아시아에서 얻은 카를루크족 추장의 딸 매래적의 아들로, 후일 순제가 되는 토곤 테무르(妥懽貼睦爾)가 있었다. 린친발에게는 캉글리족 사람 독로(秃魯)의 처가 유모로 정해졌는데, 이름과 성씨는 전하지 않는다.

린친발의 배우자와 어머니.


1238년 8월 예순테무르가 죽고, 그해 10월 13일 아들 라기바흐가 제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엘 테무르를 비롯한 군벌들과 무종의 측근들은 10월 16일 투그테무르(圖帖睦爾)를 추대했고, 11월 14일 상도에 있던 라기바흐의 군대를 격파하고 제위를 차지했다.

쿠살라는 차가타이 한국 엘지기데이의 후원으로 몽골과 차가타이 칸국 장군들을 모아 대군으로 몽골로 귀환, 1329년 1월 26일 쿠살라와 그의 군대는 카라코룸 북쪽 체첵 호수와 테르힝 차강 호수 근처에 당도했다. 투그 테무르는 위기를 느껴 양위를 선언했는데, 일설에는 엘테무르의 제안으로 양위했다고도 한다. 투그 테무르가 중서성좌승 요루테무르(躍里帖木兒)를 사자로 보내 양위를 선언했다는 설도 있다. 이때 린친발도 함께 귀국하였다.

그해 2월 27일 아버지 쿠살라는 명종으로 즉위했다. 엘 테무르는 쿠살라를 호위하고, 수도 대도 사람들은 그를 환영하였다. 쿠살라는 카라코룸에서 즉위하였다. 아버지 쿠살라는 자신의 아들들이 나이가 어려 가망이 없다고 보고, 동생인 투그 테무르를 황태자로 임명한다. 그러나 1328년 8월 2일 대도로 가던 도중, 상도 부근에서 투그테무르 태자와 만나 연회를 베풀었다. 투그테무르를 만난 지 4일 후 쿠살라는 돌연사했는데, 엘 테무르에 의해 독살되었다.

숙부 문종 투그테무르가 복위하고 다시 황태자에 봉해졌다가, 1330년 2월 24일 린친발(懿璘質班, 영종)은 녹왕(鹿+邑王)으로 봉해졌다.

린친발의 어머니 바부샤 카툰은 문종의 황후 부다시리 카툰과 갈등하다가, 1330년 4월 20일 부다시리 카툰의 사주를 받은 내시에 의해 독살되었다. 이후 린친발이 누구에 의해 양육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1331년 1월 투그 테무르는 아들 아난트라다를 황태자로 임명해야 한다는 상소를 듣고 아난트라다를 황태자로 임명했으나 1개월 만에 사망했다. 1332년 사망한 투그 테무르는 다른 아들 연첩고사(燕帖古思)가 있었지만, 형을 죽였다는 자책감에 괴로워하여 형 쿠살라(투그테무르의 형)의 아들이 다음 황위를 계승하도록 유언을 남겼다. 일설에는 투그 테무르의 황후 부다시리가 아들이 정쟁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아, 아들 엘 테구스가 황제가 되는 것을 사양했다고도 한다.

쿠살라(명종)의 둘째 아들이자 토곤 테무르(혜종)의 동생이었다. 어머니는 나이만 부족 출신인 바부샤였으며, 쿠살라가 차카타이 칸국 아래 중앙 아시아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 만났다.

아버지 쿠살라가 사망하고 동생 투그 테무르(쿠살라를 독살한 것으로 추정됨)가 즉위했을 때, 린친발은 푸왕(Prince of Fu)에 임명되었다. 투그 테무르는 1331년 1월에 아들 아라트나다라를 황태자로 세웠다.[1] 아들의 왕위를 확보하기 위해 투그 테무르의 카툰 부다시리는 린친발의 어머니 바부샤를 처형하고 토곤 테무르를 고려로 유배 보냈다.[2] 그러나 이는 불필요한 일이 되었는데, 아라트나다라는 황태자로 지명된 지 한 달 만에 사망했기 때문이다.[3]

2. 2. 즉위와 최후

1332년 9월 지진이 발생했다. 그해 10월 투그테무르의 미망인 부다시리는 투그테무르의 유언대로 쿠살라의 차남 린첸발을 옹립, 1332년 10월 23일 황제(영종)로 즉위시켰다. 린첸발이 이복 형 토곤테무르를 제칠 수 있었던 것은 엘 테무르의 견제 외에도, 그의 모후 바부샤가 정궁 황후라는 점도 작용했다. 그날 대도 황궁 대명전(大明殿)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당시 영종의 나이는 6세였다. 당시 섭정은 부다시리였지만, 엘테무르가 조정의 실세였다.

쿠살라의 장남 토곤 테무르가 살아 있었지만, 당시 권력을 잡고 있었던 엘 테무르는 그가 황좌에 오르는 것을 거부하였다. 왜냐하면 엘 테무르명종 쿠살라를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았고, 토곤 테무르는 삼촌 투그 테무르가 아버지 코실라를 독살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엘 테무르는 토곤 테무르가 즉위하면 명종 독살 의혹을 추궁할 것을 두려워했다.

1332년 10월 옹기라트주의 답납야특미실과 결혼했다. 그러나 2개월 뒤에 영종은 사망했고, 답람야특미실 황후는 1368년까지 살다가 사망한다. 11월 26일 황태후 부다시리 카툰을 태황태후로 봉하고, 11월 30일 존호를 올렸다. 신원사 22권에는 1332년 11월 30일에 상황태후에게 존호를 올렸다는 기록이 나타나나 존호명은 나타나지 않는다.

1332년 12월 14일 영종은 대도 황궁에서 7세로 갑자기 사망했다. 일설에는 살해되었다는 설과, 흑사병 또는 전염병으로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엘 테무르는 문종 투그테무르의 아들 엘 테구스를 즉위시키자고 했지만 부다시리는 그것을 거절하였고 영종의 이복 형 토곤 테무르를 황위에 올렸다. 일설에는 암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시중에는 린첸발 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 독살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의 유언 여부는 알려진 것이 없고, 곧 광서성에 있던 이복 형 토곤 테무르가 상도로 와서 황제로 즉위하였다.

2. 3. 사후

12월 16일 기련곡에 장사되었다. 일각에서는 그의 짧은 재위기간을 놓고, 그는 실제로 통치한 적이 없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3] 1337년 2월 10일 원 순제는 그에게 충성사효황제(沖聖嗣孝皇帝)의 시호를 올렸고, 묘호는 영종(寧宗)이라 하였다. 존호 여부는 알려진 것이 없다.

원사, 원사연의에는 그의 존호가 전하지 않으나, 후대에 붙은 몽골어식 존호는 에르데네초트 칸(Эрдэнэцогт хаан)으로, 몽골어로 보물, 보배로운이라는 뜻이다.

그가 갑자기 죽자 엘테무르는 당황하여 부다시리 카툰에게 엘 테구스를 차기 황제로 세울 것을 요청하였으나, 부다시리 카툰의 완강한 반대로 무산되었다.[4]

3. 가족 관계

관계이름
조부무종 카이산
조모인헌장성황후 이키레스씨
부황명종 쿠살라
모후팔불사 대황후 내마진씨
황후옹기라트씨 다리예테미시

[1]

3. 1. 조부모와 부모


  • 조부: 제3대 황제 무종 카이산
  • 조모: 추존황후 인헌장성황후(仁獻莊聖皇后) 이키레스씨
  • 부황: 제9대 황제 명종 쿠살라
  • 모후: 팔불사 대황후 내마진씨

3. 2. 후비


  • 옹기라트씨 답납야특미실 대황후
  • 옹기라트부 출신 다리예테미시 황후

4. 기년

영종원년
서력1332년
간지임신
연호지순 3년


5. 원 영종이 등장한 작품

참조

[1] 서적 Yuan shi
[2] 서적 Yuan shi
[3]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Alien regimes and border states, 907–1368
[4] 서적 The Mongols: A history
[5] 서적
[6] 서적 庚申外史
[7] 서적
[8]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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